忠州池氏譜略
층주(忠州) 지씨(池氏) 족보(族譜)는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 때에(西紀 1621년), 뇌봉공(雷峰公, 諱德海)께서 시성(始成)하시어 (제가 살펴본 바로는 본관별 성씨 순으로 31번째임), 1990년 경오보(庚午譜)까지 수 차례 수보(修譜)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충주지씨대동보(忠州池氏大同譜, 총 10卷, 1990년 庚午譜)의 일부를 불초한 제가(1971年,大田産) 번역한 것입니다. 혹시 집에 족보가 없어서 조상의 내력을 모르시거나, 또는 족보가 있더라도 한문으로 된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종친들을 위하여 조상의 뿌리를 아는 데 일조할 목적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종친들께서는 이 내용을 보시고 조상의 내력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충주 지씨가 아닌 분들께서는 다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족보의 내용은 제 직계(直系)를 중심으로 한 고려 시대까지의 계보와 조선 시대에 역사적으로 이름난 분들을 외람되게도 제 임의로 수록한 것입니다. 세대(世代)를 괄호로 묶어 놓은 것은 제 직계 조상이 아님을 표시한 것입니다. 고려때까지의 제 직계가 곧 충주 지씨의 직계가 되며, 괄호로 묶은 것은 방계(傍系)에 해당합니다. 수록된 내용은 족보의 내용은 물론이고, 제가 사사롭게 알고 있는 내용들과 견해 등을 포함하였으며, 또한 족보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다른 서적에서 정리된 조상의 행적 등을 실었습니다.
이 문서는 충주지씨대동보(忠州池氏大同譜)의 내용을 기초로 하였으나, 외람되게도 제가 임의로 족보의 내용을 짜르고 붙이고, 다른 서적에서 조상의 사적(事績) 등을 끌어오기도 하고, 또는 사사로운 제 견해 등을 덧붙였으니, 이는 다만 조상의 내력에 대해 하나라도 더 자세히 알리고자 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랄 뿐이고, 또한 오류가 없기를 바랍니다.
홈페이지 : http://www.shinbiro.com/~orinoko
전자우편 : orinoko@shinbiro.com
경오보(庚午譜) 서문(序文)에 따르면 충주 지씨는 계세(繼世: 代를 이은) 21평장사(平章事, 고려시대의 거족으로 족히 불리워질 정도임), 3功臣을 포함한 5忠節(忠義君 諱湧奇, 忠武公 諱龍壽, 忠城君 諱繼癍, 鐵山府使 諱汝海 등등) 12將軍, 103孝, 72文學, 불탐환로의(不貪宦路: 벼슬길을 탐내지 않은) 12文科(아래 도표 참조 바람), 8代 9進士(經歷公派: 8代에 걸쳐 대대로 進士를 하였음), 84司馬(生員, 進士), 31孝烈, 3大名書畵, 2大筆苑(池運永: 詩書畵 3節로 유명, 池昌翰: 詩畵에 능했음: 六堂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조선 시대의 명필로 열거된 사람들 중 이 두 분이 끼어 있음), 그외에 독립운동가로 池霞榮, 의병장 池弘文, 池靑天 장군 등이 유명하며, 특히 광복군 총사령관, 초대 무임소 장관, 제헌(制憲)·2대 국회의원인 池靑天 장군은 충주 지씨 초대 종친 회장이기도 합니다. 이상으로 방대한 대동보의 내용을 갈음하고, 아래의 내용으로 간략하나마 조상의 내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宗訓 : 信愛團合 奉先啓後
宗親間에는 信義와 血族의 따뜻한 愛情으로 서로 도우며 團合하고,
崇祖奉先하고 자라는 後孫을 正義롭게 啓導한다.
1997年晩秋,後孫濬謹書
아래의 도표는 朝鮮文科榜目(조선문과방목)에 실린 忠州池氏 대과(大科) 급제자(及第者)들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는 12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래의 문과방목(文科榜目)에 실린 분은 모두 10분입니다. 여기서 2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제가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그 2분은 諱有容公의 長子이신 諱開公이 "登文科未昌榜而卒"이라 하여, 문과에 올랐으나, 그 증서를 받지 못하고 졸하였다하니 이 榜目에 빠져있는 듯합니다. 또 한 분은 節制使 逢源公이 文科에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文宗庚午文科) 그 분이 단종(端宗) 폐위시 연루되어 유배된 후, 유배지에서 화를 입었기 때문에 누락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다만, 제가 혼자 추측해 본 것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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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
字 |
生年 |
前歷 |
官職 |
等位 |
小科 |
試驗年度 |
分派(代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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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達河 |
巨源 |
? |
進士 |
判校, 吏曹佐郞 |
丁科.18 |
?進士 |
世祖11年 乙酉春塘大榜 1465 |
縣監公派(22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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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成海 |
仲深 |
乙丑,1565 |
生員 |
郡守 |
(丙).22 |
乙卯生員 1615 |
光海10年 增廣榜 1618 |
翼安君派(25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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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德海 |
受吾 號雷峰 |
癸未,1583 |
生員 |
掌令,正言 贈都承旨 |
(丙).9 |
乙巳生員 1606 |
仁祖2甲子 1624 增廣榜 |
德山公派(25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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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天錫 |
大受 號壺山 |
庚申,1620 |
參奉 |
禮曹佐郞 |
(乙).1 |
戊子進士 |
肅宗12年 丙寅.1686 別試榜 |
敎授公派(25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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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 欽 |
敬甫 |
丁巳.1677 |
業儒 |
典籍 |
(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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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宗28年 壬午.1702 咸鏡道別試榜 |
敎授公派(26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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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應龍 |
文瞻 號松岡 |
壬寅.1722 |
幼學 |
司憲府掌令 郡守 |
(丙).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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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祖28年 壬申.1752 庭試榜 |
德山公派(30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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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德斌 |
元質 號默齋 |
丁卯.1747 |
幼學 |
正言 |
(丙).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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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祖50年 甲午.1774 式年榜 |
德山公派(31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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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鳳翎 |
? |
戊戌.1838 |
幼學 |
? |
(丙).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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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26年 己丑.1889謁聖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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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錫永 |
公允 號松村 |
乙卯,1855 |
幼學 |
正言,觀察使左承旨 |
(乙).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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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20年. 癸未.1883式年榜 |
經歷公派(31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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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鵬鉉 |
? |
丁巳,1857 |
幼學 |
? |
(乙).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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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28年 辛卯.1891增廣榜 |
? |
(?로 표시한 것은 제가 미처 확인을 못한 것입니다)
忠州池氏舊譜序
惟我池氏遠有代序῁鼻祖平章事諱宗海出自中朝,娶居忠州,忠之有(?忠州之)池氏盡自此始焉῁至麗季,我九世祖諱福龍佐忠惠王,爲判戶曹事,八世祖諱湧奇歷相恭愍Ҷ恭讓王,以定策功封忠義君,七世祖諱有容仕國祖,轉忠淸按撫使Ҷ鍾城節制使,至嘉善大夫Ҷ判義州牧,生四子,長諱開直長,次諱浩少尹,次諱溟縣令,季諱臺府使῁今之爲子孫者實自四公分派,而莫非平章事之裔也῁蓋自先世嘗有譜牒,而中經兵昛,無復存者,族譜(○)之不講亦已久矣,豈非吾宗之欠事乎?德海自少時稍有志於此,而不幸早孤無所承訓,其族系有所未詳,常自慨然而已῁及長贅于公州,聞前敎官達海卽吾宗丈,而以詩鳴于世,平日之所願拜者也῁馳往省之,相與講世系,頗悉焉῁時申相公湜以巡察使鎭公山,實池氏外孫也῁亦撰池氏世系,以示余焉,余遂錄之῁又閱東史諸書,拈出先祖之事蹟,內外諸孫隨見聞而記,積十餘年而族譜始成焉῁凡爲外孫者甚衆且顯,宗族見存者無多,亦未能有所成立者,意(○)天將大吾之門而故使之窒以益其不能歟?不然,吾先祖之所以垤躬燾後Ҷ積善流慶者,寧若是而止也耶?於戱!後屬雖有親疎,而自吾先觀之,則其初一身也῁凡觀吾譜者必指點而相示曰{某也吾先祖幾代之宗孫也,某也吾先祖幾代之外孫也},則親愛之心自然感發矣,豈復有相視如路人者哉?此吾譜之所以作也῁噫!自吾先考,以至吾之高祖,其行狀及其配某氏,皆附於其間,而他則不書者,蓋以吾作此譜而吾之所自出不敢不詳也῁敎官不以余陋,屬之以作譜,余旣不獲辭,又因以序之῁
天啓元年辛酉四月下澣 後孫德海序
德裕謹按,此序文以平章事爲鼻祖,蓋以壬辰亂後譜牒無存而然也῁其後吾家與各派同宗之私譜皆據明蹟,以宣懿公爲鼻祖傳守,久遠῁且旣新得舊蹟,則理當變而通知,故譜體之前後不同書其所以,觀者詳焉῁
後孫德裕謹識
위의 구보 서문은 족보로서의 형식을 갖추어 처음 간행된 것이지만, 대동보로서의 성격이 아니라 근린(近隣)의 몇몇 종친들만 족보 간행에 관여한 관계로 다소 세계(世系)에 차이를 보인다. 즉, 시조(始祖)를 6세조인 평장사(平章事) 諱宗海공으로 한 점과 지씨의 모든 후손을 의재(毅齋)공 諱 湧奇공의 자손으로 본 점이 그러하다. 또한 이 구보 서문의 원문에는 有容공의 계자(季子) 諱 臺의 계보가 빠져 있으나, 이후 족보 간행시 世系를 밝혀 원본에 삽입한 듯 하다. 참고로, 원문에 (○)를 삽입한 것은 문맥이 맞지 않아 확실히 잘못된 것을 제가 수정한 것이고, 또 (?)로 표시한 것은 확신하지 못하여 그대로 실은 것입니다.
우리 지씨의 대서(代序)가 참으로 유원(悠遠)하다. 비조(鼻祖; 시조) 평장사(平章事) 휘(諱; 죽은 사람의 이름) 종해(宗海)께서 중조(中朝)로부터 나오시어 충주에 취거(娶居)하시니, 충주 지씨가 모두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나의 구세조 휘(諱) 복룡(福龍)께서 충혜왕을 보좌하시어 판호조사가 되시고, 팔세조 휘(諱) 용기(湧奇)께서 공민·공양왕때 역상(歷相; 임금 대대로 재상)하시어 정책(定策)한 공으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시고, 칠세조 휘 유용(有容)께서 조선에 벼슬하시어 충청 안무사, 종성 절제사를 두루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계) 판의주 목사에 이르시고, 네 아들을 낳으시니 장자는 휘(諱) 개(開) 직장(直長)이시며, 둘째는 휘(諱) 호(浩) 소윤(少尹)이시며, 셋째는 휘(諱) 명(溟) 현령(縣令)이시며, 막내는 휘(諱) 대(臺) 부사(府使)이시다. 지금의 자손된 자는 실로 이 네 분으로부터 분파되었으니 평장사의 후예(後裔) 아닌자가 없도다.
대개 선세(先世)로부터 일찍이 보첩(譜牒)이 있었으나, 중도에 병선(兵昛; 전쟁)을 겪어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족보를 강론하지 못한 지가 또한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 어찌 오종(吾宗)의 흠사(欠事)가 아니리요? 내가 어릴때부터 이에 약간 뜻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일찍이 홀로 된 터라 승훈(承訓)을 받지 못하여 그 족계(族系)에 상세하지 못한 것이 있어 항상 스스로 개탄할 뿐이었다. 성장하여 공주에 살면서 전(前) 교관(敎官)인 達海(달해)가 바로 우리의 종장(宗丈)으로, 시(詩)로서 세상에 저명함을 듣고는 늘상 찾아가 뵙고 싶었었다. 그리하여 달려가 찾아뵙고는 세계(世系)를 서로 강론하여 자못 알게되었다. 이때에 신상공(申相公) 식(湜)이 순찰사로서 공산(公山)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사실은 지씨의 외손인지라 또한 지씨의 세계(世系)를 찬술(撰述)하여서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드디어 그것을 기록하고 또한 동사(東史)와 제서(諸書)를 열람하여 선조의 사적을 염출(拈出; 색출)하고, 내외(內外) 제손(諸孫)의 보고 들은 것을 따라 기록하여, 십여년이 되어서야 족보가 비로소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무릇 외손된 자들은 매우 많고 또한 현달하나, 우리 종족(宗族)은 현존하는 자가 많지 않고, 또한 능히 성립(成立)한 자가 있지 아니하니, 생각컨대 하늘이 우리 종문(宗門)을 이제 막아버려 그 불능(不能)함을 더하도록 함이신가? 그렇지 않다. 우리 선조들께서 몸소 힘써 후손을 도와주고 적선(積善)하며 유경(流慶)한 일들이 어찌 정녕 이와같이 끝나고 말겠는가?
오호라! 후손들이 비록 친하고 소원함이 있기는 하나, 나의 선조로부터 보면 그 시초는 한 몸이로다. 무릇 우리의 족보를 보는 자는 반드시 손가락으로 서로 가리켜 보며 이르기를, "모(某)는 내 선조의 몇 대의 종손(宗孫)이요, 모(某)는 내 선조의 몇 대의 외손이다"라고 하면 친애(親愛)하는 마음이 자연히 감발(感發)할 것이니, 어찌 서로를 볼 때 노인(路人)처럼 여기는 일이 다시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족보를 만드는 이유인 것이다.
아! 나의 선고(先考: 죽은 아버지)로부터 나의 고조(高祖)까지는 그 행장과 배위(配位)가 모두 그 칸에 부기(附記)되어 있으나, 다른 사람들의 경우 적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내가 이 족보를 만들기 때문에 나의 계보를 상세히 써놓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교관(敎官)께서 나를 누(陋)하다 않으시고 족보 만드는 일을 위촉하셨고, 내가 이미 사양할 수 없었으니, 이로 인하여 서(序)하노라.
천계 원년(서기 1622년) 신유년 4월 하순에 후손 덕해가 序하다.
내가 이 서문을 삼가 살펴보건대, 평장사 공을 비조(鼻祖)로 함은 아마도 임진란 후에 보첩이 존재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듯하다. 그후에 우리 집과 각 파 동종(同宗)의 사보(私譜)가 모두 증거가 되어 사적을 밝힘으로써 선의(宣懿)공을 비조로 전수(傳守)함이 오래되었고, 또한 이미 옛 사적을 새로 얻은 즉, 변경함이 이치에 합당하여 통지하는 고로, 족보 체제의 전후(前後)가 부동(不同)한 까닭을 적으니 보는 자는 상지(詳知)하라.
후손 덕유는 삼가 쓰다.
忠州池氏先蹟
中朝
我池本自中國來故,其見(현)於歷史紀籍者,采錄于篇首῁
(우리 지씨가 본래 중국으로부터 온 까닭에, 그 역사와 기적에 나타난 것을 책머리에 채록하여 둔다)
統譜曰,池望出西河,以居爲氏῁
(통보에 이르기를, 지(池)는 멀리 서하에서 나왔고, 거주지로서 성씨를 삼았다)
韻書曰,林郭園池,以居爲氏῁風俗通曰,蓋姓有九,或氏于號,或氏于諡,或氏于爵,或氏于國,或氏于官,或氏于字,或氏于居,或氏于事,或氏于職,以號唐禹夏殷也,以諡戴武宣穆也,以爵王公候伯也,以國曺魯宋衛也,以]官司馬司徒司空司城也,以字伯仲叔季,以居城國園池也,以事巫卜陶丘也,以職三島五鹿靑牛白馬也.
(운서에 이르기를, 임씨, 곽씨, 원씨, 지씨는 거주지로서 성씨를 삼았다. - 풍속통에 이르기를 대개 성씨는 아홉종류가 있는데, 어떤 성씨는 號에서 그 성을 취하고, 어떤 성씨는 諡에서, 어떤 성씨는 爵位에서, 어떤 성씨는 國名에서, 어떤 성씨는 벼슬이름에서, 어떤 성씨는 字에서, 어떤 성씨는 거주지에서, 어떤 성씨는 하는 일에서, 어떤 성씨는 職業에서 성을 취했다. 號로서 취한 성씨는 당, 우, 하, 은씨이고, 諡로서는 대, 무, 선, 목씨이고, 爵位로서는 왕, 공, 후, 백씨이고 나라로서는 조, 노, 송, 위씨이고, 벼슬이름으로서는 사마, 사도, 사공, 사성씨이고, 字로서는 백, 중, 숙, 계씨이고, 거주지로서는 성, 국, 원, 지씨이고, 하는 일로서는 무, 복, 도, 구씨이고, 직업으로서는 삼도, 오록, 청우, 백마씨이다)
燮理於秦,占魁於[宋] 本註,池子華爲秦相,池夢鯉爲宋咸淳特科壯元.
(秦나라에서 섭리하고(燮理: 고르게 다스림), 宋나라에서 우두머리를 점하다. - 본주는 지자화가 진나라의 승상이 되었고, 지몽리는 송나라 함순(;年號)간에 특과 장원하였음을 말한다)
中牟賢令,長溪名儒 本註,漢池瑗爲中牟令,有賢名,宋池光庭,端平進士,文學馳名,長溪人
(중모지방에 어진 수령, 장계지방의 이름난 선비. - 본주는 다음을 말한다. 즉, 한나라때 지원이 중모령이 되어, 어진 명성이 있었고, 송나라때 지광정이 단평(;年號)간에 진사가 되고,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장계사람이다.)
後漢蔡邕陳留東昏庫上里社碑曰惟斯庫上里曰東昏縣者衛地古陽武之戶涨鄕也秦時池子華爲丞相漢興陳平由此爲社下宰遂相高祖克平天下爲右丞相孝平之世虞延爲太尉熹平中延曾孫放爲尙書令宰相繼踵咸出里乃斯社所相乃樹碑作頌 見(현)淵鑑類函(연감유현에 나온다)
(후한 때, 채옹진이 동혼 고상리에 사비(社碑)를 두면서 말했다. 오직 이 고상리만을 동혼현이라 한 것은 위나라 땅으로 옛적 양무가 살던 고향 마을이기 때문이다. 진나라 때에는 (이곳 출신의) 지자화가 승상이 되고,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는 진평이 이곳에서 유래하여 사하재가 되어 마침내 한(漢) 고조(高祖)를 도와 천하를 능히 평정하여 우승상이 되고, 효평간에는 우연(虞延)이 태위가 되고, 희평중에는 연(延)의 증손 방(放)이 상서령이 되니, 재상이 끊이지 않고 이어서 모두 이 마을에서 나오니 이는 곧 이 社가 도운 것이요, 그리하여 비석을 세워 이를 기리노라)
池子華 秦丞相
(지자화. 진나라 승상)
池瑗 漢中牟令
(지원. 한나라 중모령)
池鄂 宋治平二年進士,候官人
(지악. 송나라(이후 宋나라) 치평 2년에 진사가 되다. 후관사람이다)
池聘 嘉定間,知宜州,平陽人
(지빙. 가정(;年號)간에 의주지방의 知事가 되다. 평양사람이다)
池從周 字子文,嘉定特科壯元,受業于朱子,黃巖人
(지종주. 자는 자문, 가정에 특과장원하고 주자에게 수업하다. 황암사람이다)
池光庭 端平進士,高州文學,長溪人
(지광정. 단평간에 진사가 되다. 고주문학에 속한다. 장계사람이다)
池夢鯉 咸淳甲戊特科壯元
(지몽리. 함순 갑무년에 특과장원하다)
池浩 皇明成化中,爲廣東香山知縣,徐州人
(지호. 황명(이후 明나라) 성화 중에 광동 향산의 지현이 되다. 서주사람이다)
池龍 正德進士,瞵鹿衛人
(지용. 정덕(:年號)간에 진사가 되다. 탁록위 사람이다)
池麟 正德中鋸鹿訓,汾州人
(지린. 정덕중에 거록훈(?)이 되다. 분주사람이다)
池浴德 嘉定進士,福建同安人
(지욕덕. 가정간에 진사가 되다. 복건 동안사람이다)
池榮 字仲先,號大明先生,精醫理
(지영. 자는 중선, 호는 대명선생, 의술에 정통하였다)
貫鄕 忠州 忠原 蘂城
忠州本高句麗國原城,新羅眞興王時置小京,景德王改中原京,高麗太祖二十三年改今名,成宗二年置牧,十四年置節度使號昌化軍,顯宗三年廢爲按撫使,九年定爲八牧之一,高宗四十一年陞爲國原京,還爲牧,本朝因之置忠州牧῁
충주는 본래 고구려 국원성이었다. 신라 진흥왕 때에는 소경을 두었고, 경덕왕 때에는 중원경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에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2년에 목(牧)을 두고, 14년에 절도사를 두어 창화군이라고 불렀다. 현종 3년에 폐하여 안무사로 하고,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 고종 41년에 국원경으로 승격되었으나, 다시 목(牧)으로 삼았다. 조선에 들어서는 그것에 연유하여 충주목을 두었다.
一世 癸亥十月十五日生,癸卯九月九日卒,享百一 歲῁墓中和Ҷ唐岳Ҷ華山亭
단기 3236년(AD 903) 10월 15일생(AD 903
池鏡
字自雲,號巖谷Ҷ一云樵未῁中原弘農人῁高麗光宗十一年庚申,以太學士奉使東來῁ 官金紫光祿大夫Ҷ太保Ҷ平章事῁諡宣懿῁癸亥十月十五日生,癸卯九月九日卒,享百一 歲῁墓中和Ҷ唐岳Ҷ華山亭῁
配毛氏Ҷ一云桂氏῁○一說云,公生于岐周Ҷ周樂山下,東來居中和Ҷ唐岳῁一譜云,公東 來時,辛鏡Ҷ洪鏡Ҷ郭鏡Ҷ元鏡Ҷ盧鏡Ҷ張鏡Ҷ李鏡Ҷ七學士與之俱來時,號八鏡云῁一說 云,公面黑,身白,額高,鼻長,耳後,骨高三寸,足大尺半῁
*奉使東來 : 사신(使臣)을 받들어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 아니라, 봉사(奉使)는 봉명사 신(奉命使臣)의 줄임말로서, 임금의 명을 받드는 사신의 자격으로 동래했다는 뜻 이다.
*中和 : 평안도에 있는 지역.
자(字)는 자운, 호(號)는 암곡, 또는 초수라고도 한다. 중원 홍농사람이다. 고려 광종 11년 경신년에 [서기 960년] 태학사로서 봉명사신(奉命使臣)의 자격으로 동래(東來)하였다. 벼슬은 금자광록대부, 태보(正一品), 평장사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선의이다. 계해 10월 15일에 나서, 계묘 9월 9일에 졸하였으니, 101세를 누리셨다. 묘는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배(配)는 모씨, 또는 계씨라고도 한다. ○일설에 선의공께서는 기주 주악산 아래에서 태어났고, 동래(東來)시 중화 당악산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 어느 보(譜)에서는 선의공이 동래시에 신경, 홍경, 곽경, 원경, 노경, 장경, 이경 등 칠학사가 공과 더불어 함께 왔을 적에 팔경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 일설에는 공의 얼굴은 까맣고, 몸의 빛깔은 하얗고, 이마가 높고, 코가 길고, 귀가 뒤로 젖혀져 있고, 뼈대가 삼촌이며, 발은 한척 반이나 컸다고 한다.
#. 유독 경(鏡)을 휘(諱)로 하는 성씨들의 시조(始祖)들이 꽤 있습니다. 아마도 신라말기와 고려초기에 중국에서 팔학사(八學士)들이 종종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으며, 그들이 모두 경(鏡)을 이름으로 썼는데 그것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무슨 다른 내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래에는 참고로 경(鏡)을 이름자로 삼는 다른 성씨의 시조들입니다. 그러나 선의(宣懿)공과 함께 동래하였다는 나머지 7경(鏡)들과는 그 동래(東來)시기를 볼 때 별 관계가 없는 분들 같습니다.
○ 郭鏡 : 현풍(玄豊) 곽씨의 시조로 관서지방의 홍농 사람으로 고려 인종11년 (서기 1133 년)에 귀화하여 금자광록대부, 평장사, 문하시중에 이르고, 포산(지금의 현풍)君에 봉해졌다.
○ 辛鏡 : 영산(靈山) 신씨의 시조로 고려 인종 때 금자광록대부, 평장사,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 元鏡 : 원주 원씨 응암 운곡계의 시조로, 당나라 태종 때 우리나라로 파견왔다.
○ 魏鏡 : 중국 당나라 관서 홍농 사람으로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도예지사를 청하 자 보내준 8학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신라에 들어와 벼슬이 아랑상서 시중에 이 르렀으며 회주(장흥)君에 봉해졌다.
二世 高麗 太祖 己亥生 (AD 939)
海貫
門下大雅贊成事,墓坡州郡臨津面沙?里卯坐῁
配西海郡夫人金氏,墓捽῁正廟丙午,得誌石Ҷ改封築,行歲一祭῁
*誌石 : 죽은 사람의 성명, 행적, 등을 적어 무덤앞에 묻어둔 판석(板石).
*卯坐 : 무덤의 방향, 즉 좌향(坐向)을 말한다. 묘(卯)는 그 방위(方位)를 나타낸다.
*封築 : 무덤을 만들기 위해 흙을 쌓아 올림.
벼슬은 문하대아찬성사, 묘는 파주군 임해면 사?리 묘방향에 있다. [*현존한다*]
배(配)는 서해군부인 김씨, 묘는 합장. 조선 정조(正祖) 병오년에 지석을 찾아, 봉축을 고쳐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三世 高麗 光宗 甲戊生 (AD 749)
瀛(영) 해관의 둘째아들, 첫째는 胤(윤)
副元帥
配安氏῁父判書繼泳῁墓庭山῁
벼슬은 부원수.
배(配)는 안씨, 부(父)는 판서벼슬의 이름은 계영이고, 묘는 정산이다.
四世 高麗穆宗庚子生(AD 1000)
得尙(득상)
平章事
配庾氏,墓長湍῁
벼슬은 평장사.
배(配)는 유씨이고 묘는 장단에 있다.
五世 顯宗甲午生 (AD 1024)
겁(나무 목 木변의 及자)
字天一,號雲谷῁領同政῁
配門氏῁父中郞將必遠῁墓衿川῁
자는 천일, 호는 운곡이며, 벼슬은 영동정이다.
배(配)는 문씨, 부(父)는 중랑장, 이름은 필원이다. 묘는 금천.
六世
文宗任辰生(AD 1052)
宗海(종해)
字文淑,號雲巖῁門下侍郞平章事,封忠原伯,娶居忠州,因以爲貫῁事載靑邱事林及海東姓譜῁
配金氏῁父平章事汝信῁墓上同῁
*忠原 : 지금의 忠州의 옛 이름.
자는 문숙, 호는 운암,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 충원백에 봉해졌고, 충주에서 장가들어 살았다. 그러한 연유로 그곳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이 사실은 청구사림과 해동성보에 실려 있다.
배(配)는 김씨, 부(父)는 평장사벼슬의 이름은 여신. 묘는 위와 같다.
(六世)
重翼 충주어씨의 시조
平章事῁公狀貌奇異,腋下有三鱗῁麗王異之,賜姓魚氏῁按魚氏譜,公以上五世諱啣載傍註,而但以公爲麗祖時(?始)
配金氏
*傍註 : 족보에서 선조의 諱(죽은 사람의 이름을 휘라 한다.)옆에 그 생졸연일, 행적, 배위(配位) 등을 적어 놓은 것, 또는 그 적는 장소.
벼슬은 평장사이며, 공의 생김새가 기이하고, 겨드랑이 아래에는 물고기 비늘이 세 개가 있어, 고려왕이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어씨성을 주었다. 충주 어씨보(譜)를 보건대, 공의 위로 5세조의 이름을 방주에 싣되, 단 공을 고려조의 시초로 삼고 있다. [時자는 始로 써야 옳을 것 같다.]
배(配)는 김씨.
#. 어씨에는 충주 어씨와 함종 어씨가 있다. 참고로 충주 어씨의 인구수는 1985년 기준으로 3,053명이고, 함종 어씨는 同年기준으로 10,952명이다. 충주 지씨는 同年기준으로 118,410명이다. 충주 어씨 중에는 조선 세종 때의 공신 어유소(魚有沼)가 유명하며, 그가 예성군(蘂城君, 예성은 충주의 옛 지역명)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충주로 삼았다.
七世 高麗文宗庚申生(AD1080)
憲 (헌)
字希瞻,號省谷῁門下平章事῁諡文道῁
配卞氏῁墓庭山῁
자는 희첨, 호는 성곡,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 시호(諡號)는 문도이다.
배(配)는 변씨, 묘는 정산이다.
八世 高麗肅宗任午生(AD 1102)
愼耉 (신구)
字子益,號獨齋῁刑部尙書,門下平章事῁諡恭道῁
配李氏῁墓豊德῁
자는 자익, 호는 독재, 벼슬은 형부상서, 문하평장사이고, 시호(諡號)는 공도이다.
배(配) 는 이씨, 묘는 풍덕이다.
九世 高麗仁宗乙巳生(AD 1125)
希
禮部尙書῁
配許氏῁墓上同῁
벼슬은 예부상서.
배(配)는 허씨, 묘는 위와 같다.
十世 穆宗秉午生(AD 1150)
好文 (호문)
字淸淑,號梅軒῁門下平章事῁諡忠簡῁
配李氏῁父尙書根῁墓交河῁
자는 청숙, 호는 매헌, 벼슬은 문하평장사이고, 시호(諡號)는 충간이다.
배(配)는 이씨, 父는 벼슬이 상서, 이름은 근이다. 묘는 교하이다.
(十世)
資深 (자심)
平章事῁按麗史,明宗十六年,公爲按撫使,征耽羅῁神宗五年,拜慶尙按察使῁
配金氏,墓洪山
*耽羅 : 제주도의 옛 이름
*拜 : 벼슬을 제수하다.
벼슬은 평장사이다. 고려사(高麗史)를 보건대, 명종 15년, 공이 안무사가 되어 탐라를 정벌하였다. 신종 5년에는 경상도 안찰사에 제수되었다.
배(配) 는 김씨이고, 묘는 홍산이다.
#. 고려사(高麗史)에 공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즉, 위에서 기술한 공의 행적은 고려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秀 (수)
平章事῁
配裵氏῁墓交河῁
벼슬은 평장사이다.
배(配)는 배씨이고, 묘는 교하이다.
十二世 神宗壬戊生(AD 1202)
聖三 (성삼)
吏部尙書῁集賢殿太學士῁
配唐氏῁父永修῁墓長湍῁
벼슬은 이부상서, 집현전 태학사를 지냈다.